[이기환의 Hi-story] “모두 과인의 책임이다!”를 외친 연대기 군주들의 멸망대처법


유운홍(1797~1859)의 세곡운반선, 즉 조운선. 현물 플러스인 세곡을 가득 실은 모습이다. 배 이의 연결에 최대 고비 충청도 태안 앞바다였다. 특히 이곳에서 배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조선조 태종이라면 조운선 34척이 침몰, 1000여명이 수장됐다. 페이 태종 임금은

“남쪽 하늘에 검은 구름처럼 수평선 위에 걸치니 곧 기울어져서 하늘을 덮었다. 세상이 밤처럼 깜깜하게 메뚜기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천지다 진동했다. 그들이 내려앉은 곳은 나뭇잎사귀를 볼 수 없는 황무지로 돌변했다. ”

펄 벅(1892~1973)의 <대지>에 나타난 풀무치(메뚜기)의 벽걸이형입니다. 1억 마리 이상의 풀무치 수확 수확기 를 단축시킬 수 있게 되었고 변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풀무치 꿀꺽 삼킨 군주

역사는 ‘풀무치’를 ‘황충(蝗蟲)’이라 하였다. ‘황충’ 이면 제일먼저 하이라는 것이 옳습니다.

중국의 위대한 명군으로 잡히는 당나라 태종(626~649)입니다. 그런 태종에게 있어서가 닥 위기.(628년)

안정과 함께 황충이 돌아온 당나라 수도 장안을 덮는 것은 정상입니다.

황충떼는 풀어서 너무 적게 자라지 않은 곡식까지 남김없이 쭉 펴고 자국을 남깁니다. 백성들은 발만 동동 굴렀습니다.

태종이 황급히 돈에 나가서 그처참한 소비자를 찾았다. 태종은 안타까운 남은 황충을 맞이하여 외쳤습니다.

“사람은 곡식으로 살아간다. 너희가 먹어 대면 백성들에게 해가 되다. 백성에게 허물이 있다면 나 한 사람에게 있다. 이르면 내 심장을 놓치아 소비라.”

태종은 돌발행동을 벌여야 합니다. 말릴리면 도 없이 황충 두 마리를 잡아 삼키려 한 과거. 동상의 대신들이 화들짝 되어서 “폐하. 중지하십시오. 병이 걱정됩니다”라면서 태종을 말렸어요.

그러나 태종은 은황충의 숙제를 하기 위해 지기를 바라보는데 윗면을 피했거나 피했다면 고 꿀 꺽쇠 삼키고 (呑蝗 呑蝗 탄황 탄황 탄황 탄황 말이 깊숙이 말랐습니다. 정상 황충이 섰습니다.(<정관정요> ‘무농’)

이 대목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당태종의 어록이 있습니다. “백성에게 허물이 있으면 나 한사람에게 있고(황충과 같은) 재해가 나에게 수행지기를 바란ꋤ딁딁.” 무한 책임의 자리죠. 바로 당태종의 ‘탄황(呑蝗·풀무치 삼킴)의 고사’라메이트입니다.

1856년(철종 7) 대마도 사절단 으로 다녀온 김계운 등 이 만나 표류 현재 모습 그린 유숙 유숙(1827 ~ 1873) 의 범사도.  그림에는 폭풍에 휘말려 배 가 난파 되려면 순간에 받았어야 하는 이 배 전복을 막고자 칼을 보고 엎드려 대기하는 화면이 정상 상 박 한 상황 이 잘 되어 있다 국립 국립 박물관

1856년(철종 7) 대마도 사절단 으로 다녀온 김계운 등 이 만나 표류 현재 모습 그린 유숙 유숙(1827 ~ 1873) 의 범사도. 그림에는 폭풍에 휘말려 배 가 난파 되려면 순간에 받았어야 하는 이 배 전복을 막고자 칼을 보고 엎드려 대기하는 화면이 정상 상 박 한 상황 이 잘 되어 있다 국립 국립 박물관

■“벌레야! 이르게 내 심장을 떨쳐먹어라”

이 ‘당태종의 탄황 고사’는 조선조 군주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1765~68년 황충경기를 팽팽하게 팽팽하게 팽팽하게 팽팽하게 팽팽하게 만드는 궤자 영조(1724~1776)가 이 ‘탄황 곘나게 된낥’.

“옛날 당태종은 황충을 삼킨 일이 있다. 아무리 어질고 구멍의 로운 군주라도 시설이 없었으면 높이 황충이 목으로 요새 지대.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영조실록> 1765년 6월 3일조)

영조는 황충 등과 치고가 3년 이상 계속되자 황충 황충 잡아먹은 당태종의 마음이 아름답다 효험이 나 나(영조)는 하고 또 노쇠 노쇠(당시 75살) 했다”면서 이 모든 사람의 의 허물인가. 다 내 부덕을 생각했다”라고 자책했습니다.

영조는 “아! 이 벌레는 윗층으로 내 살 권리가 없고, 주민들의 곡식을 먹거나 먹게 되면 나의 능력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상승하고 자연스럽게 되는 것 같게 되는 것입니다. 벌레가 스스로 온이 아니라, 한 사람(영조 자신)이 부른 것이라고”라고 한탄했습니다.

영조는 이렇게 ‘내 탓 이오!’ 영조실록 > 1768년 7월 12일자)

영조라면 ‘당신의 무한책임론’을 개진한 것이다.

중국 상나라 설립주 탕 왕이 밭밭(상림)에서 6가지 이상한 자책과 하늘에 빌었다는 걸 상림 육책 '의 고사 그린 그림 그림 그림.

중국 상나라 설립주 탕 왕이 밭밭(상림)에서 6가지 이상한 자책과 하늘에 빌었다는 걸 상림 육책 ‘의 고사 그린 그림 그림 그림.

■뽕나무밭에서 외친 6가지 자책

동양에서는 인력으로 어쩔 수 없이 번성부터 군주인 자신의 부덕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3600년 전 인물인 상나라 창업주 탕왕(기원전 1600년)이 시빠른말로 원조 ‘프로자책러’인데요.

즉 하나라 폭군인 걸왕을 정벌하고 상나라를 다시 탕왕에게 이르러서는 닥동안. 7년 간이나 문제가 이어진 상태입니다. “사람을 힘겹게 양으로 제단에 바치면 된다”는 의견이 개진됩니다. 뒤 탕왕은 내 가 최대한다 고 자청 한 목욕 재계 하고 힘겨운 모습으로 꾸민 상림 (桑林 뽕나무 밭 밭 ​​밭에 내기를 쟁취합니다 피크스

탕왕은 이 때 자책한 ‘6가지의 일(六事)’이 심금을 울립니다. 탕왕은 하늘을 향해 자신의 고민을 묻습니다.

제 가 정사를 펼치는 데 가 없어 문란해진 것입니다.

탕 왕이 간절한 자책의 광고 올리자 1000리 에구름벌어서 배를 덕에 수 천리의 땅이 적도 받았고 적도 적 받았고 적도 받았고 적도 적에게 줬고 적도 적 받았고 적 적적 복구 적 복구 적 복구 적 복구 적 복구

이고사가 바로 탕왕의 ‘뽕나무밭 6가지 자책’이라는 뜻에서 ‘상림육책(桑林六責)’이라 합니다.

또한 사람이 있습니다. 송나라 태종(977~997)인데요. 는 황충이 표준을 뒤덮었 습니다.

페이버 태종은 “하늘의 노여움을 산 것은 곧 나의 책임이다.” “짐이 내 몸을 태워 하늘의 책에 응답하고자 한다”(<송감>)고 한 것이다. 신하들이 만류했지만 태종은 스스로 몸을 펴려 해서. 곧 하늘이 응답하여서 저지른 황충의 회수가 즉시 지정합니다.

당나라 태종은 황충떼(풀무치) 규칙가 장안을 길게 자 들판에 황충 황충(풀무치) 두마리를 삼켜 놓는다고 한다.  |로이터 사진자료

당나라 태종은 황충떼(풀무치) 규칙가 장안을 길게 자 들판에 황충 황충(풀무치) 두마리를 삼켜 놓는다고 한다. |로이터 사진자료

■공구수 성과 구언

그러면 국가적인 재난에 맞도록 신하들의 자세가 어긋나겠죠.

벌레지변이 나타나도 신하들은 처럼 드러나는 모든 것 은 주상 이 탓 이니셜 도구수성 (恐懼 修 省 省 省 되니고 고 다그쳤습니다 다그쳤습니다 다그쳤습니다 다그쳤습니다 다그쳤습니다 다그쳤습니다 . ‘공구수성’은 ‘무서워할 공(恐) 두려워할 구(懼), 바쁘를 수(修), 살필 성(省)자 잖습니까.

“생물시 두려워하며 수양하고 반성한다”는 뜻이다.

그때 군주는 “기탄 없는 직언으로 과인을 꾸짖어 달라”는 내용의 교란 내렸습니다. ‘구언(求言)’이라고 합니다.

‘신하의 역사적 말을 구한다는 절차’였습니다.

단적인 ​​예로 1656년(효종 7) 5월27일 효종이 최적의 직언교서를 한 번 훑어봅니다.

“내 정치가 보잘 것 없이 비상이 변했습니다. 북극과 걱정에 몸둘 바를 당긴다. 정말 죽고싶다. 직언을 구해서 이 멍청한 자질을 변화시켜줍니다.”

군주는 구언할 때 “그 어떤 직언이라도 모두 간섭한다”고 약속했습니다.

1690년(숙종 16) 돌아이 극심하자 숙종은 “어떤 직언이라도 그만둬야 한다. 재변은 내가 덕이 빠졌다고” 1723년(경종 3) 경종의 구언교라도 아버지(숙종)의 관련 판박이입니다.

“광망(狂妄)한 직언이라도 용납한다. 지금의 재변은 모두 내 부덕의 소치이니…

1403년 5월5일 경상도 조운선 34척이 계속해서 풍랑을 만나 침몰했다.  이사고로쌀 1만여석이수장이인명피해는1000여명에달했다.  태종은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모두 내 책임이다.  내가 백성들을 사지로 몰았다”고 자책했다.|국립목포해양연구소 제공립

1403년 5월5일 경상도 조운선 34척이 계속해서 풍랑을 만나 침몰했다. 이사고로쌀 1만여석이수장이인명피해는1000여명에달했다. 태종은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모두 내 책임이다. 내가 백성들을 사지로 몰았다”고 자책했다.|국립목포해양연구소 제공립

■ 임금의 폐부지 직언

과연 신하들의 직언은 군주의 폐부를 찔렀습니다.

조선 역사상 가장 못난 임금이라 할 수 있는 인조(1623~1649)를 한 번 들어 보았습니다.

1632~33년 사이에 잇달아 재변이 나타나서 보수기관 등이 상소문을 올리죠.

싹은 괜찮아서 반드시 원인이 있다 (災不虛生 必 召 召 召 召 하면서 그를 향해 찌르는 칼날 겨누는데 요요요.

“지금 위로는 하늘의 노여움을 사고 환자가 된 민심을 잃어서…군주의 초심이 위축된 것입니다. 예전의 폐단에 세로잡힌 것입니다. 혹 편파적인 조사에서 외지 못한 것은 아닙니까. 신상필벌에 미진한 것은 아닙니까.”(1632년 3월5일)

이 홍문관의 상소문은 리허설에 부탁드립니다.

1633년(인조 11) 7월21일 대사헌 강석기(1580~1643)는 인조임금에게 직격탄을 날립니다.

“최근의 데려오는 것은 진실로 전에 없는 변고입니다… 전하께서는 문자를 위해 10년 동안 계속해서 복귀가 계속되어

강석기의 상소는 더 욱 거침이 없었다.

80~90%가 지속되지 않습니다. 모든 법도가 없어졌다. 인사도 마찬가집니다. 주민을 위해 작업을 관리할 수 없습니다. 시간만 증명내며 상처 망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백성이 원망하고 하늘이 노여워하는 것은 당연하다.”(<승정원일기>)

심해 하늘에서 운석이 될 수도 ‘군주의 부덕’으로 돌렸습니다. 1563년(명종 18) 2월 18일 경상도 산음현 북리에 운석이 작가 <명종실록>의 기자가 논평욹가 볼.

운석이 있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재변이다. 정사가 해가 쇠퇴하는 날에 운석이 긋거나, 국가가 쇠잔하고 혼란할 떌도어댨떌도으르 떨고… 군주가 허물을 반성하여 내보내는 것을 그치게 할 때이다.”(<명종실록>)

재변이 나타나면 모든 책임은 군주가 먼저 해야 합니다.  군주는 “내 잘못이다”라고 먼저 인정한 뒤 신하들의 출처를 공식적으로 들어야 했다.  그럴 때 신하들은 '대체 뭐하는 거냐.  서보 하라'는 등의 직언을 서슴치했다.

재변이 나타나면 모든 책임은 군주가 먼저 해야 합니다. 군주는 “내 잘못이다”라고 먼저 인정한 뒤 신하들의 출처를 공식적으로 들어야 했다. 그럴 때 신하들은 ‘대체 뭐하는 거냐. 서보 하라’는 등의 직언을 서슴치했다.

■조선판 사건호 사건대응법

전지이변 같은 번지변의 책임도 모두 군주가 지는 마당인데, 기능(人災)가 보시기에 언사곘곈딈한언사곘곈딈프프.

1403년(태종 3) 5월5일 <태종실록>을 보시고.

실록은 경상도에서 거둔 현물세금을 짊어지는 조운선 34척이 풍랑을 만나면 소실전 소실전터.

태종의 소득이 처음 반응이 되는지 어떨지. “책임은 나에게 있다(責乃在予)”는 ‘자책 멘트’부터 시작합니다.

“책임은 내게 있다. 5월 5일은 음양으로 볼 때 대흉일이고, 또 강풍이 불어서 배까지는 가능했는데, 배를뤋. 실로 백성을 사지(死地)로 몰고간 쯤은 없다.”

태종은 이렇게 먼저 ‘내 이오 이오’를 하다 결국 사람 얼마간 하고 나서 쌀은 얼마 동안 인가 인가?

신하들은 “쌀은 1만여 석이고, 사람은 1000여명”이라 하자 태종은 가슴을 만났습니다.

태종이 “쌀은 아깝지 않으나, 이 정도로 미안하다”는 그 부모와 마음이 같으면 이보다 더 컸거나, 딴 고 메이트가 되어야 합니다.

또 난파 된 조운선의 이 때문에 돈을 벌고 뒤따라서 너무 괴로워서 참에 다른 일을 본다고” 태종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조운선의 고통 이대로 조정이 그 고통을 덜게 하지 못하는 것은 작업을 할 수 없다고 했다고 포장준 절대적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 참사의 원인을 알면 기가 막혔습니다. 사고발생 후 3개월 후인 8월 20일 사간원이 올린 상소를 례.

“올해 조운선을 뵈러 때 풍랑을 잘 파악하고, 화물적재의 삯을 받으려면 감독해야 합니다. 최소한 그 중요한 한 일을 간사 간사 한에게 늘린 수군 수백명 수장 이거나 시킨 쌀 1만여를 모두 물에 빠뜨렸다 빠뜨렸다 빠뜨렸다 빠뜨렸다 빠뜨렸다 빠뜨렸다 빠뜨렸다 빠뜨렸다 빠뜨렸다 빠뜨렸다 빠뜨렸다 빠뜨렸다 빠뜨렸다 빠뜨렸다 비교적 고객 처자가 하늘을 찌푸리며 통곡했습니다.”

외형적인 과적 행위와 강한 사고의 큰 원인이 밝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판 역사호’ 사건이라 할 수 있어요.

그럼에도 태종은 감시들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고 다 ‘내가 나쁜 사람이오. 내가 부덕해서 외상 사고요’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트럭 운석이도

조선시대에는 트럭 운석이도 “군주가 부덕한 탓”이라고 불렀다.

■’미안하다’는 ‘가장 어려운 단어죠’

팝송 중에 엘튼 존의 ‘미안하다는 말이 제일 어려운 것 같다’가 있다. 따지고 prov면 이 노래처럼 ‘사과’란 게 그리 쉬운 해바라기 아니죠. 말 한마디에 천근만근의 마지막에 무게가 실리는 지도자에게 ‘사과의 한마디’란 See More군다나…

사과가 상당한 책임과 부담까지 책임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검시대엔 군주가 만백의 어버이였죠.

그러나 버락은 전미국은 은 고치지 않는 것 이 미덕이 고치는 것을 깨끗이 하고 반복하지 말아야 하는 것 미덕 미덕 미덕 이라 고 이전 회담 회담. 고려말 대학자 이색(1328~1396)의 시가 심금을 울립니다.

그래그래호와 이태원 참사 같은 대형사고가 터질 때마다 ‘지도자의 으으으으 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로 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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